[스크랩] 유체이탈때 五感지녀
보다 직접적인 영의 존재증명은 몸을 잃은 사후영혼이 직접 자신을 증명
해 보이는 것.
대구시 동구 팔공산의 파계사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승팔이'얘기는 일제
때 한용운스님이 발간한 '佛敎'잡지 38호에 '神과 接語한 이야기'란 제목
의 취재기사로 실려있다.
주인공 승팔이는 경주에 사는 崔씨 집안에서 태어났다가 8세때 홍역으로
사망해 땅에 묻혔다. 그러나 명부전의 수명이 72세임이 저승에서 밝혀져
무덤으로 돌아갔으나 육신이 빠져나올 수가 없자 중음신(中陰身.떠돌이귀
신)이 됐다.
떠돌던 귀신은 파계사에서 한 스님의 허락을 얻어, 공양주보살 劉모씨
(여)와 더불어 경내 심부름꾼으로 나머지 수명을 살았다.
선방의 아무개 스님을 모셔오라는 하명을 받을 경우, 승팔이 눈에는 화
두일념으로 수행에 정진하는 스님은 안보이지만 망상에 빠진 스님은 보인
다고 해 선방의 스님들이 열심히 선(禪) 수행을 하는 분위기가 잡히기도
했다.
佛敎잡지에 쓰인 내용은 卞설호씨 등 3명이 승팔이 얘기를 확인 취재한
내용으로 劉씨의 방에서 모두 네차례 승팔이의 영혼과 담소한 기록이다.
취재도중 승팔이는 '천왕'이라는 귀신을 데려와 일행에게 소개시켰고,
이 천왕이 금호강 건너 대구 남문파출소앞 가게에서 술과 안주를 사오기까
지 했다는 것이다.
천왕은 '마침 오늘 금호강신이 어디가고 없으니 다른 신들은 있더라도
구애될 것이 없다'는 말과 함께 동전대신 지폐 1원과 주전자 목쟁반 등을
들고 30분만에 심부름을 다녀왔다.
천왕과 승팔이가 맛있게 받아먹은 술과 안주는 보기에는 아무 변화가 없
었다. 卞씨 등이 며칠 뒤 남문파출소앞 가게에 가서 사실을 확인하자, 주
인이 "그 시간에 안면없는 웬 노인이 술과 안주를 사갔다"고 말했다.
다음날 卞씨 등이 신형(身形)을 보여달라고 요구하자, 천왕은 명부의 책
벌이 있으니 보여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승팔이는 당시 '태순'이라는 안
동군 일직면 태생의 여자귀신을 장차 인간의 몸을 받아 아내로 삼을 사람
이라고 소개했다.
승팔이는 천상의 제석궁(帝釋宮)에서 훔쳐온 옥피리를 불었다고 하며 천
왕은 이 사건을 수사하러온 제석궁의 차사(差使)였다고 전한다. 기사의 말
미는 '옥피리도 있었고, 태순이도 있었고, 천왕도, 승팔이도 있었다'고 돼
있다.
승팔이의 이야기는 현재의 파계사 노스님들에게서도 전해들을 수 있다.
배도원 주지스님은 구전돼오던 이 사실을 지난 83년 5월13일 본인의 친필
로 사실임을 기록에 남겨 보관하고 있다.
인근 부인사 주지 성타스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며 "30년전 성철스
님이 수련대학생들을 상대로한 법문때 하신 말씀을 직접 들었다"고 말했다.
성철스님은 파계사 성전암에서 수도한 적이 있었다.
성타스님에 따르면 생전 수명대로 산 승팔이는 업을 닦아준 파계사 스님
들에게 감사를 표시한 뒤, 중국의 어디 어디에서 환생할 터이니 지나는 길
에 꼭 들러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한다.
부인사 숭모전의 선덕여왕 어진(御眞)에 얽힌 일화는 영매를 통해 영의
존재가 증명되는 보통의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이라는 데서
영의존재를 확인하는데 유리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이 모후 마야부인 金씨를 기리기 위해 7세기쯤 창건했
다. 불교를 중흥시킨 여왕은 생전에 "생을 마치면 미륵부처를 친견한 뒤
성불해 중생제도를 위해 다시 오겠다. 그때는 부인사에 와서 지키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경북대 사학과 문경현교수는 "여왕은 샤먼적 성향이 강했다"고 평한다.
그런데 18년전쯤 대구시내 韓모씨라는 나병환자 영매가 느닷없이 선덕여왕
을 모시고 있다며 부인사 어진에 얽힌 내용을 말해 뒤에 대한초능력학회초
대부회장을 지낸 禹煥三씨(사망) 등이 영남대 사학과 교수 한 명과 찾아갔
다.
禹씨 등이 "여왕을 불러 보라"고 하자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못쓰는 韓
씨는 신이 내린 상태에서 여왕이 생전에 거느렸던 신하들과 불국사 및 부
인사 건물을 단청한 사람의 이름을 줄줄이 댔다.
사학자 등 앞에서 자신이 선덕여왕임을 증명한 韓씨의 몸주 귀신은 "현
재 부인사에 걸린 내그림은 실제 모습과 다르니 다시 그려달라"고 주문했
다. 당시 부인사측은 원래 모셨던 여왕의 어진을 도난당하자, 다른 사진을
걸어놓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대구시내 S극장 사장 李모씨(사망)가 비용을 부담해,
시킨대로 새어진을 그려 모셨다. 이에앞서 "화가를 누구로 하면 좋겠느냐"
는 질문에 여왕은 "미술대생이면 족하다.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으며 실제 극장간판을 그린 사람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S극장 李씨가 나선 것은 당시 식물인간 상태였던 자
신의 아들을 치료해줄 것을 韓씨에게서 약속받았기 때문.
그러나 韓씨에 의하면 그 아들은 業이 깊어 여왕이 데려간뒤 다른 아이
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한 두 달뒤 그 약속이 이뤄졌다.
당시 그림 봉안식에는 절밑 마을(대구시 동구 신무동) 사람들이 많이 참
석했는데 "도난당한 어진과 똑같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
불심과 공덕이 컸던 선덕여왕이 성불하지 않고 韓씨에게 강림한 사유는
신라 당시 여왕의 스승이 韓씨의 어머니로 환생했다가 죽었으나, 나병으로
고생하는 딸이 마음에 걸려 자꾸 지상으로 내려가자 여왕이 대신 돌봐주겠
다며 나섰다고 설명됐다.
이같은 일화에 대해 부인사 주지 성타스님은 "성군이 일개 서민에게 중
음신이 돼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라고 일축하고, "귀신중에
도 영특한 귀신이 있어 자신을 여왕이라고 속여 강림한 것"이라고 분석했
다.
성타스님은 "산신을 모신다는 무당이 많은데 거의가 중간 귀신의 장난으
로 본다"고 예를 들었다. 어느쪽이든 영혼의 존재가 입증된 한 사건이었다.
한편 이 사건뒤에 부임한 성타스님은 지난 90년 숭모전을 만들면서 韓씨
의 주선으로 그려진 어진 대신 경북대 미술학과 모교수가 그린 그림을 모
셨으나, 치마의 무늬가 옷주름을 소화시키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영혼의존재와 정령계 영계 중음신 제령 천도(薦度)에 대해 靑華(태안사)
哲雄(파계사 성전암) 釋性愚스님(파계사)등 선승들은 하나같이 "논의가 불
필요하다"며 당연히 인정하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