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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를 보아라... 혹자들은 남자이기를 포기한 불구자라 하지만 귀매가 볼 때는 그는 여자보다 더 여자다운 사람이다 무엇이 그를 성별의 혼란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 한 이야기를 들려 드린다
성별(性別)의 혼란
전생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성별의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서부 벵갈의 돌란 미트라(Dolan Mitra)와 미얀마 북부의 마 틴 아웅 묘(Ma Tin Aung Myo)는 자신들이 전생에 남자였다고 주장했으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남자아이들의 놀이를 즐겼다. 1967년 8월 8일 태어난 돌란은 세살 때부터 오빠의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더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축구와 크리켓을 가장 좋아했다.
그녀의 어머니인 코니카 미트라가 오빠의 옷을 더럽힌다고 심하게 꾸짖자, 그녀는 부르드완에서 오빠보다 더 큰 소년으로 산 적이 있다고 항변했다. 부르드완은 그녀의 집이 있는 나렌드라푸르에서 75마일 정도 떨어진 마을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부르드완으로 데려다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그리고 부모가 청을 들어주지 않자 크게 낙담했다. 결국,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한 부모들이 그녀를 부르드완으로 데리고 가는데 동의했으며, 그녀의 주장은 그 진실성이 입증되었다. 1971년의 첫번째 방문에서는 돌란이 전생에 살던 집을 확인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1972년 5월의 두번째 시도에서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안나푸르나 사원의 푯말이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한 돌란은 꼬꼬불한 길을 지나 아나트 샤란 데이의 집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데이의 막내딸인 리타가 나와 돌란을 맞아들였다. 돌란은 집안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있다는 듯이 이방 저방을 돌아다녔으며, 방안에 물건들을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녀는 리타의 오빠인 니쉬트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니쉬트는 학생이며 유능한 운동선수였는데, 1964년 7월 25일 캘커타 병원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한 젊은이였다. 돌란은 여러 명의 여자들 중에서 니쉬트의 어머니를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계속된 확인 실험에서 친척과 친구들을 정확하게 가려내었다.
마 틴 아웅 묘의 전생에 대한 기억은 더욱 인상적이다. 1953년 태어난 그녀는 네 살 때 처음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느 날 그녀는 아빠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엉엉 울었다.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총에 맞아 죽었어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이차 대전 중에 나툴이라는 마을에 주둔하는 일본군인이었는데 비행기의 기총소사를 받고 죽었다고 했다. 그녀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큰 혁대를 찬 자신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리고 비행기가 급강하하면서 사격을 퍼부을 때, 자신은 웃통을 벗은 채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고 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남자아이의 옷을 입고 군인 흉내내는 것을 즐겼다. 열 두 살 되던 해, 그녀는 여학생 교복을 입을 것을 강요당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열 아홉 살 때에는 자신의 성별(性別)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녀는 계속 남성복을 입었으며 남편을 원치않았다. 그 대신 마음에 드는 여성과 결혼하고싶다는 말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열살 무렵이면 전생에 대한 기억은 삶의 열기 속에 묻혀 안개처럼 증발되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때쯤 되면 그전까지의 이상한 행동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다른 지역의 다른 삶에 대한 소아기적 동경은 혼란과 고통을 낳고, 그런 현상은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그 기억 속의 친척 집을 방문하려고 할 때마다, 부모들은 그런 감정적 충동을 억제하는 쪽으로 자녀들을 다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다른 집-그들은 그 집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으로 달려감으로써 부모에게 응수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심리학자인 헬렌 웸바크 박사는 아이들로하여금 전생을 기억하도록 부추키는 것을 반대한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시기상조적인 몰두'가 현생의 삶에 적응하는데 있어서 불필요한 부담을 줄 뿐이라 말한다. 그녀는 오래 전 환생 연구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심리치료 도중 일어났던 한가지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과잉행동증(Hyperactivity)을 보이는 피터라는 다섯 살 짜리 소년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터는 경찰관으로 살았던 자신에 삶의 독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 웸바크 박사는 피터가 텔레비젼에서 본 드라마를 자신의 이야기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터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웸바크 박사는 그 내용이 피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졌다. 소년의 어머니가 말한 바에 따르면, 피터가 그런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세 살때부터이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야기를 꾸며내지 말라.'고 야단쳤다는 것이다.
피터는 법과 질서에 대해 많은 말을 했으며, 웸바크 박사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즐겼다. 그런 즐거움은 어느 날 소년의 엄마가 어떤 사건을 이야기해 줄 때까지 계속되었다. 피터가 길거리에 서서 교통정리하는 것을 보고 경찰관이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웸바크 박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다소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피터는 경찰관으로써 자신이 맡은 임무를 설명해 주었고, 그것은 그가 전생의 기억에 의해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다섯살 짜리 소년의 행동으로는 좀 염려스러운 것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그의 이야기에 몰두하여 그런 점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클라호마의 와우코미스에 사는 두살 짜리 소년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지미라고 고집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이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아냐, 네 이름은 제레미야. 제레미 앤더슨이라구!" 어느 날 할머니인 낸시 앤더슨과 함께 그림책을 보고있던 제레미는 왜건형 자동차를 지적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제레미의 곤란한 상황에 대해 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애는 왜건 자동차가 자기를 치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자기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왜건의 운전자에 대해 화를 냈어요." 한번은 제레미의 할아버지인 잭이 등이 아파 아파 침대에 누워있는데 제레미가 물었다. "등이 안좋아요, 파파? 그것때문에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잭은 등이 아프긴 해도 그것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제레미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한때는 등을 다친 적이 있는데 그것때문에 죽었는 걸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그곳으로부터 90마일 떨어진 오클라호마 통카와의 공동묘지에는 '제임스 L. 하우저(1952년 8월 22일-1967년 8월 12일)'라는 이름의 묘비명이 서 있었다. '지미'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그는 낸시 앤더슨의 아들이었으며, 제레미의 아버지인 론 앤더슨의 이복형제였다. 그는 통카와에서 고조 할머니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찌는듯이 무더운 8월의 어느 날 15번째 생일을 열흘 앞두고서 생애를 마감했다. 경찰의 보고서에 의하면, 열 네살의 지미 하우저와 그의 친구인 케빈 루카스는 뷰익 세단을 몰고 75마일의 속도로 달리다가 교외의 교차로에서 트럭과 충돌했다. 운전대는 루카스가 잡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자동차는 99피트를 미끌어진 뒤에, 달려오던 두번째 트럭에 받쳐서 108피트를 더 뒹굴면서 튕겨져나갔다. 루카스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의 삶뿐만 아니라 사고 자체를 기억하기 못할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고, 지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1980년 4월 다섯 살 되던 해, 제레미는 사고장면을 떠올렸다. 그는 사고 당시의 주변정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어떻게 차 밖으로 튕겨져 나갔는지 설명했다. "나는 총알처럼 날아갔어요.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 같았죠." 지미의 시체를 조사했던 검시관은 나중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 시체가 훼손된 유형을 보면, 승객보다는 운전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었을 때도 제레미는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사고당시 자신이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고 줄곧 주장해왔던 것이다.
두 살짜리 비행사.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부분의 아이들만이 전생을 자각하는 것일까? 유아기의 어린아이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빈도수가 상대적으로 낮다고 해도 그들에게 환생이 제한되어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스티븐슨 박사는 말한다. 희미한 기억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릴 수 있는 자극이 있다면, 가령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특정한 장소에 감으로써 자극받을 기회만 주어진다면 환생은 더 폭넓은 현상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느끼는 '데자 부(Deja vu)' 현상은 어른 아이 할것 없이 흔히 있는 일이다. 이 기시(旣視)현상은 전생의 기억이 작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는 꿈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다.
꿈과 데자부 현상은 전생의 삶에 대해 극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환생을 특정 개인뿐만 아니라 대중에게까지 설득력있게 만드는 것은 유아들의 즉흥적인 발언이다. 그들은 자의식이나 사회적인 조건에 물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생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도 다음의 경우를 접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라무'라는 2년 9개월짜리 아이는 이상하리만큼 헬리콥터에 집착했다. 그는 자신이 인도 공군 소속의 비행사였다고 주장했으며, 헬기를 조종하는 동작을 취하면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 동작은 너무나 정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시기, 토론토에서는 두살 짜리 어린아이가 엘리베이터 문이 단히는 것을 보고는 새파랗게 질려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아이가 얼마나 놀라서 떨었던지 그 비명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극도로 무감각한 사람이었으리라. 아이의 엄마가 "바보처럼 굴지 마. 엘리베이터가 널 죽이지는 않아."하고 말했지만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에는 엘리베이터가 날 죽였단 말야!"
전세계를 여행하면서 유아들의 전생담을 수집하고 대조해본 결과, 이언 스티븐슨과 히멘드라 배너지는 환생이 실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배너지는 24년동안 연구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이런 현상을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하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나로 하여금 환생을 믿게 만드는 사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스티븐슨은 배너지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지적으로 엄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주도면밀한 전문가도 결국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이성적인 사람조차도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환생을 믿을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믿음은 종교적인 교리와 문화적 전통에 근거한 믿음이 아니라, 엄밀한 증거에 입각한 것이다."
이러한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모든 어린이들을 새로운 관심과 존중으로 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주목할만한 아이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을 단순히 부모들의 유전자 조합체가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성장을 위해 태어난 존재로 보는 시각을 넓혀야 하며, 가족은 단지 그들의 최신형 무대를 위한 소품에 불과하다는 교훈말이다.
환생을 연구한 사람들. 이언 스티븐슨 박사와 히멘드라 배너지는 전생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아이들을 찾아 알래스카에서 자이레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분야에 매진했음에도 불구하고 협력관계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반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유아기의 기억에 대해 20년이 넘도록 선구적인 연구를 해온 이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로스엔젤레스에 기반을 둔 배너지는 작고 통통한 체격에 검은 피부의 인물이다. 그는 사교적인 것이 지나쳐서 유명해지기를 갈망하는 인물로 비칠 정도이다. 반면에, 스티븐슨은 버지니아 대학의 정신과 교수로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하얀 피부의 인물로 신중한 성격이다. 이 두 사람은 한때 같이 일한 적이 있지만 서로의 전문가적인 치밀함때문에 1964년 이래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연구팀의 도움을 받은 스티븐슨은 어린이들을 조사한 2000건 이상의 사례들을 초심리학 분과의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배너지는 그의 부인이며 유일한 조력자인 마기트의 도움을 받아 1100건 이상의 사례를 수집했다. 이 작업은 1955년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그의 조국인 인도의 한 대학교수는 그에게 "이런 일을 하다가는 당신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것이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배너지는 그런 충고가 일리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그 당시에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었다."고 회고한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기존의 과학체계는 환생에 대해 배타적이고 냉담한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배너지는 환생이라는 이 민감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갖고 거기에 대항해야 한다. 스티븐슨의 저작이 치밀하고 학문적인 스타일을 취하고 있는데 반해, 배너지의 책들은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1957년 인도에 '초심리학 협회'를 세운 배너지는 1970년 이래 미국에 살고 있다. 그는 한 사람의 연구자로써 자신이 탐정, 법률가, 심리학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는 "진지한 사람들이 엄밀한 증거를 통해 그들 스스로 환생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자료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몬트리올 태생의 스티븐슨 박사가 이룬 연구 결과는 <신경증과 정신병:Journal of Nervous and Mental Disease>이라는 잡지에 게재되어왔다. 그는 환생 연구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 "인간성에 대한 현대 이론들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유전형질이나 유아기의 환경적 요인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특정 행동을 환생 이론으로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친구이며 열렬한 팬인 해롤드 리프 박사는 스티븐슨을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며 외골수로 파고드는 연구자라고 평가한다. 리프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티븐슨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는 중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20세기의 갈릴레오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
자료제공 명상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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