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빈 呂洞賓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신선을 꼽으라면 바로 여동빈(呂洞賓, 본명 은 암巖, 호는 순양純陽)일 것이다. 그는 중국 도교의 정통파인 전진교 (全眞敎)의 뿌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흔히 여조(呂祖)라 불린다. 그는 종리권(鐘離權) 선인에게 도 를 전해 받아 신선이 된 후, 11세기부 터는 점차 세속에서 이름을 알리며 신선의 대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의 모습은 반드시 검을 등에 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 검은 탐 진, 애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는 다는 진검(眞劍), 혹은 심검(心劍)이 라 한다. 여동빈이 일반 민중의 두터운 신앙대상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민중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의 소원을 이뤄주기 때문이었다. “개가 여동빈을 보고 짖다니, 좋은 사람을 몰라본다”(狗咬呂洞濱, 不識好人心)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그는 ‘사람 이 진심으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하여 이루어준다’는 유구필응(有求必應)의 모범 이었다. 방랑 끝에 스승을 만나다 여동빈은 당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14년(798년)에 포주(浦州) 영락현(永 樂縣)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 조부, 부친 모두가 벼슬을 지냈으니 당시로서는 명문가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눈으로 보는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마음대로 말하면 글 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 20에 부친의 명을 따라 유교위(劉校尉)의 딸과 혼인했는 데 비록 결혼은 했으나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후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과거급제를 바랐으나 2번의 진사시험에 낙방한 후 강주(江州)에서 방랑하였다. 세상을 떠돌며 그가 평생에 이루고자 한 것은 무엇 이었을까? 10번의 시험과정을 통과하다 62세에 이르러 또 다시 장안(長安)에 과거를 치르러 갔다가 술집에 이르러 탄 식하기를 “급제하여 부모 마음을 위로할 날 언제이고, 득도하여 내 마음을 달랠 날은 언제련가?” 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늙은 도사가 웃으며 묻기를 “젊은이, 출세할 뜻이 있는가?” 하였다. 그 도사는 푸른 도건에 흰옷을 입고 허리에 큰 표주박을 차고 있었다. 이윽고 벽에 시 한 수를 썼는데 그 시정이 표연히 세속을 떠나 있었다. 여동빈은 깜짝 놀라 절을 올리고 성씨를 물었다. 도사가 말하길 “내 성은 종리(鐘離)요 이름은 권(權), 자는 운방(雲房)이네.” 하였다. 그가 바로 당팔선 중의 한 사람으로 훗날 여동빈의 스승이 되는 종리권인데, 이것이 여동빈과 종리권의 첫만남이었다. 종리권은 한나라 때 사람이므로 이미 500세도 더 된 신선이었다. 여동빈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선도 배우기 를 간청했다. 그러나 종리권은 여동빈의 속세의 인연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뒷 날을 기약하고 나는 듯 가버렸다. 이후 종리권은 여동빈이 도를 받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를 보기 위해 10가지 관문의 혹독한 시험을 치르게 한다. 이것이 ‘운방십시동빈(雲房十試洞賓)’의 일 화인데,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첫 번째는 여동빈이 하루는 밖에서 돌아오니 집사람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그 러나 그는 마음에 슬퍼함 없이 다만 후하게 갖추어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죽 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또 하나는, 정월 초하루에 거지가 문에 기대어 구걸하기에 돈을 주었다. 그런 데 돈이 적다고 짜증을 내기에 여동빈이 더 주었는데도 여러 가지로 트집을 잡 으며 함부로 꾸짖었다. 그럼에도 여동빈이 예의를 갖추어 사의를 표하자 거지가 웃으며 가버렸다. 그리고 하루는 교외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집에 있는 물건들을 도적들이 싹 쓸어가 버리고 없었다. 하지만 동빈은 성내지 않았다. 이후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이 없어 밭을 갈아 자급하는데 홀연 호미 밑에서 금 수십 덩이가 나왔다. 그러 나 그는 급히 덮어버리고 이를 취하지 않았다. 마지막 관문으로, 밤에 야차(夜叉) 수십이 나타나서 사형수를 쥐어틀어 피와 살이 엉기었다. 그러자 사형수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전세에 나를 죽였으니 급히 내 목숨을 살려내라.”고 했다. 이에 동빈이 “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보 상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려 하자 홀연 공중에서 꾸짖는 소리 가 나더니 귀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종리권이 나타나 여동빈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속세의 마음은 없어지기 어렵고, 선인의 재주는 만나기가 어렵다. 내가 사람을 구하는 것은 남이 나를 구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네.” 하였다. 스승이 제자를 찾는 것은 오히려 제자가 스승을 찾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 이니 도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가를 느끼게 해주는 말 이다. 종리권이 계속해서 이르기를 “내가 열 번을 시험했으나 모두 꺾이지 않으니 그대는 반드시 득도할 것이네.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여 3,000의 공 (功)을 꽉 채워 800행(行)을 원만히 하면 바야흐로 신선이 될 것이네.” 하였다. 여 동빈의 스승은 신선의 길을 감에 있어 모든 고난과 고통을 뛰어넘어 자신의 생 명을 완성시키는 것[行]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함께 사는 세상사람을 구제하는 것[功]이 몇 배나 소중한 과정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리고 “세간에 살며 공행을 닦은 후에 나와 같이 살도록 하게.” 했다. 그러자 여동빈이 말하기를 “저의 뜻은 선생님과 다릅니다. 반드시 중생을 모두 구제하 고 떳떳이 상계에 오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종리권은 여동빈이 자신보다 훨씬 더 큰 도를 깨닫는 신선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여동빈이 원하던 바는 단순히 득도하여 자신만의 평안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을 등지지 않은 도세(度世)의 삶 대개 사람이 득도를 하면 답답한 몸을 벗고 천상으로 오르고자 한다. 하지만 세속의 오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중생을 구하는 큰 보살과 같은 삶을 산 신 선들도 많이 있었다. 도교에서는 속세를 초탈하여 신선의 경지로 중생을 인도하 는 것을 ‘도세(度世)’한다고 한다. 여동빈은 종리권이 떠난 후 73세에 대도를 원만히 이루고 도세의 삶을 살게 된다. 이후 여동빈은 천상의 상제님으로부터 신선의 재목을 고르라는 선선사(選 仙史)의 관직을 받고, 인간 세상에서 오래도록 활동을 하게 되었다. 훗날 여동빈 은 인연있는 사람을 찾아 금단(金丹)의 도로써 영생불사(永生不死)의 선맥을 전 한다. 지금껏 신선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은 한사람이라도 더 인간을 세속에서 건져내어 선맥을 전수하려는 그의 애틋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 그는 세상에 수시로 모습을 나타내 어서 때로는 걸식하는 사람으로, 때 로는 늙고 쇠잔한 영감으로, 때로는 누추한 중으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 을 가름질하고 그의 공덕을 헤아린 후에 도를 전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여동빈이 무창(武
|
'남성 하소주천 > 마음과 축기 ,운기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티벳 최고의 성자 밀라레빠 (0) | 2016.05.10 |
---|---|
鄭北窓(정북창) (0) | 2016.05.09 |
기호흡 축기 --고요하고 부드럽게 (0) | 2016.03.22 |
축기 --내공의 의미 (0) | 2016.03.02 |
축기--마음과 기 (0) | 2016.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