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환생

사후세계에 대하여 1

김동수 2018. 5. 25. 21:09

사후세계에 대하여 1 

 (* 이 글은 2000년 6월 잡지 정신세계에 실렸었고,

다시 단행본 <내 영혼을 위한 시네마(2004)>에도 포함된 원고이다.)

삶 이후의 삶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과 영혼> <애니메이션 천녀유혼> <환생>

 

어느 날 제자 계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삶도 알지 못하거늘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사실 그렇죠.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릅니다. 그저 하루하루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뿐이죠.

죽음 따위는 아예 영원히 자기 앞에 오지 않을 낯선 객처럼 여기면서요.

그러나 죽음은 꼭 늙어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죠.

우리 삶의 어느 순간에도 들이닥칠 수 있는 손님,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투 타이어드 투 다이>에서 젊고 건강한 겐지(금성무)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죠.

죽음의 신으로부터 12시간밖에 생이 남지 않았다는 통고를 받고 겐지는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가 그 소중한 시간에 보여준 태도는 적이 실망스러운 것이었죠.

그저 세속적인 욕망의 발산에 소비하니까요.

 

비슷하면서도 다른 예가 <조 블랙의 사랑>에 나옵니다.

이 영화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 빌(앤소니 홉킨스)에게도 겐지에게 일어난 것과 꼭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는 겐지와 달리 인생의 끝을 멋지게 마무리하고 의연히 떠나지요.

밤하늘 가득 수놓는 아름답고 찬란한 축복의 불꽃 속에서

유유히 저승사자 조 블랙(브래드 피트)과 죽음의 여행을 떠납니다.

누구나 연출하고 싶은 그런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남긴 채….

 


 


 


 

소크라테스의 최후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계로와 공자 사이의 대화 후편 같은 이야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기다리며 미소 짓습니다.

그러자 제자 크리톤이 물었죠.

 

“어째서 그렇게 행복해 하십니까?”

“나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나는 커다란 신비의 문 앞에서 있다.

가슴이 떨리는구나. 나는 미지의 멋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빌이나 소크라테스처럼 초연한 태도로 죽음을 맞지 못하죠.

심지어는 죽었어도 자신이 죽은 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요.

심리학자 융도 이런 상황이 인류의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양태라고 말합니다.

 


 

물질계만이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은 자기가 육체를 떠난 영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사랑과 영혼>에서 칼에 찔린 샘(패트릭 스웨이지)이 강도를 쫓아 뛰어가다가 돌아왔을 때

정말 당혹스런 상황이 벌어져 있음을 목격하지요.

연인 몰리(데미 무어)가 자기 시체를 안고 울고 있었으니까요.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크리스(로빈 윌리암스)도 교통사고를 당한 뒤 유사한 경험을 하지요.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를 볼 수 있고 울음소리까지 들을 수 있지만, 말을 걸면 그녀는 전혀 알아듣질 못했죠.

 


 

이런 예들 중 가장 머리 나쁜 영혼을 들라면 단연 <식스 센스>의 말콤 크로우(부르스 윌리스)였죠.

그는 육체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자기가 죽은 걸 눈치 채니까요.

하지만 최근 <디 아더스>의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심지어 마지막 순간까지 죽은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까요.

아무튼 이 두 영화는 그런 주제를 이용해 충격적인 최후 반전을 만들어낸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한 때 우리는 “언체인드 멜로디를 안 듣고 살 수 없나?”하고 툴툴거릴 만큼

하루 종일 여기저기서 <사랑과 영혼>의 주제가를 들어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미끈하게 잘 생긴 서양 귀신의 러브 스토리가

으스스한 전설의 고향 귀신만 봐왔던

우리에게 그만큼 더 신선하고 가슴 찡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에소테릭적인 관점에서 <사랑과 영혼>을 분석해 본다면

영화 속 샘(페트릭 스웨이지)의 행동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가 이승에서 머뭇거리는 것은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죠.

아무리 딱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죽은 자는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앞에 놓인 길을 가야합니다.

또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 역시 사자(死者)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가져서는 안 되고요.

 

 

그런데 영화 속 두 주인공 샘과 몰리(데미 무어)는 가장 위험스런 방법으로 서로 통신합니다.

영매를 통한 것이 그것이죠. 비교(秘敎)에서는 그런 행위를 엄격히 금합니다.

세상에서 지인을 잃은 사람들은 흔히 그 고인과 어떻게든 소통하고 싶은 마음에 영매를 찾곤 합니다.

그러나 이 때 영매를 통해 말하는 영혼은 대개 다른 존재들입니다.

그가 아무리 둘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요.

 


우리의 물질계를 넘어선 아스트랄계에는

엘리멘탈(Elemental)이라는 존재들이 있어서 그런 기회를 이용해 힘을 행사하려 합니다.

목소리는 물론 모습까지도 사자(死者) 흉내를 낼 수 있는 능력이 그들에게는 있습니다.

모든 비전(秘傳)의 가르침들은 이구동성으로 영계 통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칫 빙의와 같은 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육체를 떠난 사자들은 이승과의 통신은커녕 대개 자기 앞길을 추스리기에도 바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바르도(Bardo)의 현란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죠.

바르도란 죽음과 환생 사이의 중간 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도 합니다.

  

애니메이션 <천녀유혼>은 바로 이 바르도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비해 장국영과 왕조현이 주연한 <천녀유혼>은 단순한 귀신 영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천녀유혼>에서 주인공 아영은 마치 『신곡』의 단테처럼 사후 세계를 여행하게 됩니다.

거기서 아영은 그의 베아트리체라 할 수 있는 소천을 만나게 되죠.

그는 소천과 함께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갖가지 상태의 바르도를 겪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는 『티벳 사자의 서』에서 말하는 시드파 바르도의 상태가 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시드파 바르도란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환영들이 나타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에서 나쁜 카르마를 지닌 사자는 악귀나 괴물들로부터 쫓겨 다니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죠.

『이집트 사자의 서』에는 이때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주문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은 모두 생전에 자신이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이 환상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그것은 마음의 환영일 뿐입니다.

사자의 내부에 이미 잠재돼 있던 것들이 펼쳐지는 것이죠.

 

그러나 사자에게 그 모든 장면들은 너무도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거기서는 이승에서 타인에게 준 상처나 고통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때 느끼는 감정은 말할 수 없이 예리합니다.

  

에소테릭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육체는 갑옷과 같아서 그런 다른 차원의 부정적 느낌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다고 하지요.

예를 들어 악몽을 꾸었을 때 우리는 한참 가위눌리다가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나

“휴! 꿈이었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잠에서 깨게 된 것은 우리의 의식이 다른 차원(아스트랄계)에 있다가 육체로 도망쳐 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자에게는 피난처이자 요새 역할을 하는 육체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바르도 상태에서 달려드는 악귀들한테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죠.

보호막인 육체가 없기 때문에 그 감정적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됩니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모든 악과 직면하게 되지만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고통을 통해 의식이 정화될 때까지요. 이를테면 지옥이란 바로 그런 체험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러나 반대로 생전에 선한 삶을 살았던 영혼은 그만큼 또 강렬한 환희를 느끼게 됩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크리스(로빈 윌리암스)는 자기 주변에 펼쳐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경을 보고 외칩니다. “여긴 내 천국이야!” 그곳은 상상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이죠.

이승에서 자기가 소망했던 모든 것들이 생각만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지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데바찬(천계)이라고 하죠.

  

한편 크리스와는 반대로 그의 아내 애니는 자식과 남편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하다

결국 자살하여 지옥(저급 아스트랄계)에 갇히게 됩니다.

사후세계에서 크리스를 인도하는 앨버트 교수는 마치

『신곡』에서 단테를 인도하는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죠. “여기선 그 누구도 심판하지 않아. 순리일 뿐이야.”

 


 사실 사후의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것뿐이죠.

그렇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한 생각에 지옥에서 천상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 거구요.

『티벳 사자의 서』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미망을 떨쳐 버리라. 그러면 그 순간 자유를 얻으리라.’

애니가 마지막 순간 극적으로 어둠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바로 이 공식을 적용함으로써죠.

 

하지만 말로는 쉬워도 실제 상황에 닥쳐서는 거의 무용지물입니다.

바르도계의 사슬들 중 하나로 화의 상태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죠.

사람들은 누구나 화를 냅니다. 세부적으로 볼 때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는 조건은 사람들마다 다르지요.

‘난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저것은 도저히 못참아!’하는 것들이 각자 있게 마련이지요.

화와 관련해 깨우쳐야 할 교훈이 있는 사람은 사후에 바르도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가 싫어하는 그 모습, 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누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자기가 지독히도 싫어하는 바로 그 행동을 합니다.

그걸 보면서 사자는 부글거립니다. 잠시 후 그 사람이 사라집니다.

사자는 화난 마음을 간신히 억누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 그 싫어하는 행동을 유사하게 또 합니다.

그리고는 또 부글거리게 만들고 유유히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나타난다는 겁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사자는 입에 거품을 물며 '도대체 왜 다들 내게 이런 짓들이지?' 하면서도

자기가 지금 바르도의 상태에 있고 그것이 단지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가 여전히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대부분의 경우 이 상태에 처한

사자들은 뚜껑이 열려 미칠 듯 부글부글거리고 씩씩거리기만 하다가 나오게 됩니다.

각성의 여지? 그런 건 거의 없습니다.

바르도의 바퀴가 돌아 다른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사자는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어? 이제는 왜 화가 안 나지?’ 이것이 현실입니다.


 


애니메이션 <천녀유혼>과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마지막 장면에는

남녀 주인공들이 환생 후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 건지 안타까워하는 애절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영과 소천의 경우 환생문을 통과하며 과거를 잊게 만드는 무정망치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죠.


레테의 강, 망각의 강은 바로 우리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강이 흐르는 우리의 육체. 새로운 몸에 들어온

영혼은 전생의 일들은 물론 바르도 상태에서 겪었던 고통과 기쁨에 대한 모든 일들을 잊어버리게 되니까요.

그러나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잠재의식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아뢰야식(제8식)에 하나도 남김없이 저장되어 있는 것이죠.

최면을 통해 전생퇴행을 함으로써 그 안에 저장된 기록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도 가능하구요.

 


바로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가 <환생>입니다.

이 영화는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6’의 끝 구절로 시작되지요.

‘죽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며, 훨씬 행복한 것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풀의 상징을 통해 환생의 진리를 노래한 것인데, 영화의 주제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음악가 로만(캐내스 브레너)은 아내 마가렛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됩니다.

그로부터 42년 후 로만과 마가렛은 마이크와 그레이스로 환생하여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죠.

그리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레이스가 최면술사 프랭클린으로부터 전생퇴행요법을 받으면서부터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

 


전생요법은 심리학의 정신분석이 과거로 무한히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정신분석이, 유년기나 태아기에 그치지 않고 과거로 더욱 거슬러 올라가 전생에까지 미치는 것이죠.

그렇게 하여 전생에서 받은 트라우마를 찾아냄으로써 억압된 감정을 해소시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그 원리입니다.

 

그러나 섣불리 그것을 다루는 것이 꼭이 바람직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잠재의식은 판도라의 상자와 같습니다.

특히나 그 뚜껑이, 여러모로 소양이 부족한 시술자에 의해 열릴 때 문제는 더욱 커지죠.

현대의 오컬티스트인 마크 헤드슬은 그의 저서 『젤라토르, 비밀의 역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고 있는 뚜껑을 여는 자는 매우 용기 있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더욱이 인간 영혼의 깊은 비밀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카르마와 환생을 다루는 것은 위험하다.”

 


<환생>에서는 마크 헤드슬이 지적한 문제점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최면술사 프랭클린은 자신의 기술을 오용하고,

그레이스는 전생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마이크를 오해해 총으로 쏘기도 하니까요.

그레이스는 전생의 사건들을 반전된 상으로 봅니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이런 일은,

자기의 행위를 잊고 싶거나 거부하고 싶을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영화 속에서, 그 사건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는 우주섭리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풀려나갑니다.

 

‘작디작은 새싹도 죽음이란 진정 없다는 걸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휘트먼의 시에 나오는 이 구절처럼 우리의 영혼은 삶에서 삶으로 이어져나갑니다.

카발라에서는 그것을 길굴(gilgul)이라고 하지요.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이 바꾸어 놓는 것은

다만 우리의 얼굴을 덮는 가면밖에 없다.

죽음은 옷을 벗고 바람 속에 서는 것이요, 햇볕에 녹아드는 것이다.”

 

우리가 내면에 존재하는 불멸의 자아를 발견한다면

성경의 다음 말이 바로 우리의 외침이 될 것입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노라.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