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강화 기공수련 /탄트라

쿤달리니의 제 현상

김동수 2015. 7. 30. 22:02

쿤달리니의 제 현상 

 

쿤달리니 혹은 소주천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같은 현상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누차 이야기 해왔다.
하지만 현재 한국 수행문화의 대표격인 불교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이단시하거나
외도로 모는 것이 현 실정이다.
티베트 밀교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무상요가라고 부르며 상당히 높은 수준의 수행이며
또한 반드시 지나가야 할 과정이라고 여기지만 한국은 선불교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는 자세한 과정을 말해놓은 것에 대해 오히려 선의 특성상 위배된다는
이유로 그것을 경원시 한다.
그러나 진정 수행을 열심히 하는 선승들 중에 자신에게 일어난 몸의 변화에 대해
발표는 하지 않지만 그 까닭과 기전을 찾아 헤매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실상 쿤달리니 각성이라는 현상은 과거 인도와 중국에서도 무척 희귀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누구든지 손쉽게 일으킬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현상은 너무 신비화되고 과장된 면도 없지 않다.
그래서 그런 현상이 제대로 일어난 사람을 신성시하는 풍토마저 생겨난 것이다.
요가에서 아바타르, 즉 신성의 화신이라고 부르거나 선도에서 신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주어진 단계별로 올바른 스승을 만나 열심히 수행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인 것이다.
물론 배우는 제자의 근기에 따라서 각자의 시간적 차이는 있으리라고 본다.
중요한 점은 과거에 그런 것을 빙자해서 가짜 스승들이 그러한 현상을 너무나
신비화해 놓았다는데 있는 것이다.
신비화시킨 것은 거짓이기에 충분히 외도나 이단시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진실한 반응일 때는 그것을 외도나 이단으로 몰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생리적인 반응인 것이지 어떤 교조적 도그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쿤달리니가 각성되면 가장 먼저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사람의 성격이 명상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래의 성격이 동적이거나 다혈질이라면 그 반대의 성질로 바뀌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정(精)이 기(氣)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것을 앞에서도 연정화기(煉精化炁)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이 현재 문화라고 즐기는 제반 현상은 정(精)이 기화되지 않고
정액(精液)으로 흐를 때 즐거움을 느끼게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정액의 흐름은 육근(六根)이라는, 이른바 오감과 육식의 작용인 사념작용에
에너지를 불어넣어 좀더 세밀해지고 좀더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이나 문학이나 모든 세속적 감각의 즐거움이 모두 이 육근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정액이 기로 바뀌어버린 사람에게는 세속의 제반 문화 현상이 점점 싫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연정화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서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오히려 숲과 한적한 자연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숲이 우거진 자연 속에서는 자신의 몸 속에 일어나는 에너지의 변화와 공감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세속을 버리고 시끄러운 저자거리를 떠나서
숲이나 산과 같은 한적한 자연을 찾게 마련이다.

 

이제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수행자라고 부를 수 있다.
수행자는 이제 더욱 자신의 내면을 향해 몰입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그 길이 즐거운 길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앉아서 명상을 시킨다고 누가 하겠는가?
정액이 몸 속에 과다하게 흐르는 사람은 잠시도 조용히 앉아있지 못한다.
그러한 사람을 억지로 앉혀놓는 것은 가장 심한 고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정액이 기로 바뀌어 그 기가 흘러가는 사람은 점점 더 쾌감을 느끼게 되고
그 쾌감은 결국 고요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거기에서 수월하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할지라도 그의 기억 속에는 여러 가지 세속적 습관과
욕구불만이 녹아져 있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그런 농축되어 있는 과거의 기억들을 미세번뇌(微細煩腦)라고 부르지만
어쨌든 그러한 미세번뇌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큰 번뇌들이 사라지는
고비를 넘긴 뒤에 충분한 고요함에 이르게 되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미세번뇌를 느낄 정도의 잔잔한 수면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자신의 욕망이 마치 현실처럼 스크린에 펼쳐져서 아주 입체적인 영화를
보는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만큼 어쨌든 둘 다 같다고 할 수 있는
내면적 경상들을 대하게 되는데 그것은 쿤달리니 에너지가 강할수록 더욱 강하고
생생한 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것을 선도(仙道)에서는 식신(識神)의 작용으로 인한 마(魔)라고 말한다.
이러한 마장(魔障)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은 결국 자신의 내면인 것이다.
그러한 마장을 쿤달리니 과정에서는 크게 세 가지 고비로 나누어 말하는데
그것이 곧 그란티(장애)라고 부르는 것으로 물라다라 에너지 센터,
아나하타 에너지 센터, 그리고 끝으로 아즈냐 에너지 센터에서 만나게 된다고 보았다.
그것을 각각 인도어로 브라흐마 그란티, 비쉬뉴 그란티, 루드라 그란티라고 부르며
그 각각의 현상들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가 있다.

 

어쨌든 수행자가 그러한 장애들을 모두 극복하고 마지막 종착점인 사하스라라에
이르게 되면 그는 자신의 의식으로 육체를 초탈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때부터는 사실상 대쿤달리니라는 과정을 공부하게 되는데 선도에서는 이를 가리켜
양신(陽神)과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티베트 밀교에서는 ‘포와(phowa; 의식전이)’라고 부르는데
의식을 몸 밖으로 옮겨서 다른 육체에 깃들이거나 자유롭게 공간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그것이 순숙해지면 시공간을 초월하게 되기까지 하는 과정으로 티베트 밀교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의 수행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면 티베트 밀교의 수행법을 간단히 대략적으로 비교해보자면
선도의 소주천에 해당하는 진양화 퇴음부 과정이 있다.
그것을 ‘뚬모’ 수행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호흡과 명상을 통해 몸 속에
생명열(生命熱)을 일으키게 하는 수행이다.
티베트는 워낙에 추운 곳이어서 퇴음부, 다시 말하면 몸 속에 시원한 물이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환경적 요인으로서 만약 영하 20도 이상의 곳에서 퇴음부를 강조한다는 것은
곧바로 육체의 동사(凍死)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인도에서는 상황이 정반대이다.
거기에는 열요가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몸 속에 시원한 물이 돌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동서남북 사방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땡볕에 앉아서
그 열기를 견뎌내는 것이다.
그의 몸 속에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돌지 않는다면 그는 열사병(熱射病)으로
바로 쓰러지게 될 것이다.
어쨌든 같은 쿤달리니 과정이지만 물의 기도(氣道)인 이다(ida)를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불의 기도인 핑갈라(pingala)를 강조할 것인지는 수행자가 처한 자연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지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아니다.
어쨌든 불의 기도 즉 핑갈라를 중히 여기는 티베트에서는 진양화(進陽火)만을
강조하고 있다.
뜨거운 열기가 독맥 뿐만 아니라 충맥을 타고 대뇌에까지 올라가는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뚬모 수행 역시 대표적인 연정화기의 과정인데 이것을 가장 훌륭하게 성취한
사람이 바로 밀라레파라는 성자이다.

 

뚬모를 성취한 다음 과정이 빛의 요가인 정광명(淨光明)요가라고 부르는 과정인데
이것은 선도에서 빛을 회광하는 단계이다.
쿤달리니과정에서 보자면 머리 속에 있는 의식 즉 아스트랄체와 가슴 속에 있는
의식 즉 코자르체 사이에 빛을 교류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선도에서는 이것을 시월양태라고 부르며 연기화신의 과정이라고 여긴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티베트 밀교에서 포와라고 부르는 의식전이의 요가를 말하는데
역시 여기에서도 어떤 하나의 의식체를 언급한다.
그들은 그것을 의생신(意生身)이라고 부르는데 글자대로 풀이하자면
‘뜻에 의해 생겨난 몸’으로서 양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도에서 그 다음 단계인 연신환허라고 부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의식의 초탈이니 양신이니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영체(靈體)를 단련하는 것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영을 영체라고 부를 것이 없다.
그러나 쿤달리니나 소주천 현상을 오래도록 겪은 사람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정액이 변화되어 기가 되고 그것이 또 신(神)으로 변해 결국 가슴에 있는
영에게 영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에너지를 부여하게 된다.
그 영체는 계속해서 머리에서 나오는 신의 에너지를 모아가면서
점점 의식의 힘이 강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영의 존재감을 의식하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깊은 수행을 통해서만 그러한 감각이 생겨난다.
마치 불교적 수행을 오래도록 하게 되면 아뢰야식에서 일어나는 미세번뇌를 느끼고
그 느낌을 통해 아뢰야식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아뢰야식은 영체의 식작용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선도에서는 영체나 아뢰야식이란 단어를 표현하지 않고 원신(元神)이라고 말한다.
원신의 에너지가 되는 것을 대약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신(神)에너지가
변형 압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선도에서는 도태(道胎)과정 혹은 양태(養胎)과정이라고 부르며
다르게 표현해서 대주천 과정이라고 부른다.
요가에서는 쿤달리니 과정을 소쿤달리니와 대쿤달리니로 이분하지만
선도에서는 소주천, 대주천, 그리고 양신과정 이렇게 삼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여 넘어갈 부분이 있다.
이것은 필자의 사견에 해당하지만 분명히 밝혀놓아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사실상 인도의 요가는 엄밀하게 따지면 동양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이집트에서 머물던 백인계통의 아리안족이 점점 동진하면서
인도에까지 오게 된 뒤로 생겨난 문화이다.
그리고 요가 문화를 이루고 있는 인도어(산스크리트어)도 언어학상으로 보면
유럽어와 한 어족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들은 인도를 점령한 뒤 원주민과의 혼혈을 방지하기 위해
카스트제도를 만들었다.
결국 그들의 문화 속에는 아리안족 본래의 문화가 깃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집트 신비주의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집트 신비주의는 본래 원산지가 어디였을까?
그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 플라톤학파의 말을 빌리자면 아틀란티스의 문화이다.

 

그 대륙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각변동으로 인해 수몰되고
그 잔존 문화가 이집트에 이어져서 이집트가 가장 고대의 문화를 이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현재의 통상적인 다수의견이다.
그래서 이집트 신비주의 속에는 쿤달리니의 상징으로 보이는 것들이
자주 나오며 결국 유대교, 그리스 신비주의, 페르시아의 마니교 등이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아리안족이 만든 문화가 베다문화이며 거기에서 나온 것이 요가문화인데
여기에서 나오는 쿤달리니는 소쿤달리니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무척이나 아이러니하게도 붓다의 출현이라는 것이 대두되게 된다.

 

붓다는 모든 학자들이 말하듯이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요가수행자였다.
그러나 붓다는 아리안족이 정립한 소쿤달리니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들의 스승의 경지를 넘어서서 당시에 현존해 있는 요가적 쿤달리니를 넘어선
어떤 것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그는 사실상 드라비다족 출신이었다.

 

드라비다족이란 아리안 족이 오기 전부터 인도 땅에 있었던 토착민이었다.
그들이 아리안족의 침입을 받아서 망하고 그 계급이 수드라로 전락되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석가모니 붓다는 드라비다족으로서
아직 아리안족에게 그 정권이 멸망당하지 않은 왕족 출신이었다.
그러한 석가모니 붓다가 아리안족의 문화를 초월해버린 것이다.

 

그는 힌두 요가의 한계를 벗어나서 불교라는 가르침의 교조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유종삼매, 즉 소쿤달리니의 한계에서 벗어나
무종삼매 즉 대쿤달리니의 과정을 터득한 것이다.
그렇다면 드라비다족에게 그러한 가르침이 있었을까?
학문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리안족이 침입하기 이전에
모헨조다로라든지 하르파 유적을 보면 상당한 문화가 이미 드라비다족에게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 고고학적 사실로 드러나며 그러한 문화는
역시 중국과 동이족의 선도문화의 연장인 것으로 유추된다.

 

실제로 드라비다족의 생김새는 한족이나 동이족 즉 북방인종의 생김새와 유사하다.
석가모니의 42세 때의 초상화가 남아있는데 그 그림에서도 보자면 그러하다.
그리고 그 문화는 결국 기원전 약 일만 이천년 경 태평양에서 같은
수몰의 운명을 겪은 레므리아대륙의 무우 문화인 것이다.

 

요가에서는 소쿤달리니 과정밖에 없기에 인도의 불상을 보면 모두 붓다 뒤에
코브라뱀이 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코브라뱀은 이집트의 파라오상에서도 나오듯이 소쿤달리니의 상징이다.
하지만 대쿤달리니 즉 양신 과정에서 허공 분열하는 작은 부처들이 후광처럼
둘러쳐져 있는 형태의 불상은 중국이나 한국 혹은 티베트밖에 없는 것이다.

 

티베트의 불상은 인도의 그것과는 달리 포와 수행으로 인한 작은 부처들이
주불(主佛)을 둘러싸고 있다.
그 작은 부처들이 바로 양신(陽神) 문화이며 대쿤달리니 과정으로서
그것은 결국 선도이거나 혹은 티베트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뵌교라고 부르는
티베트 샤머니즘의 문화로서 결국 그 원뿌리는 무우(Mu)문화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선사시대에 대한 고고학자들 중에 소수이긴 하지만 일곱 개의 뱀머리가 달린
칠두사(七豆蛇) 혹은 나가(큰뱀, 용) 문양들이 태평양 연안과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우문화의 잔재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석가모니 붓다는 남방문화 즉 아리안족의 요가와 북방문화 즉 동이족과
한족의 선도를 자신의 몸 속에서 수행을 통해 하나로 통합한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드라비다족 출신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안족의 쿤달리니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너무나 유명한 예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의 공부과정(요가 쿤달리니)에 미진함을 느껴서 티베트까지 가서
양신문화의 가르침을 받고 왔다는 설도 있다.
이는 티베트의 문헌에 ‘이사(Isa)’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그의 행적에서 요가나 선도의 수련과정이 나오는지 한번 살펴보자.

 

예수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수를 마셔야 한다고 말하며
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을 믿고 따를 것을 강조했는데
영원한 생명이란 불로불사의 선도(요가) 사상이지 유대교 개념이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말을 믿는 자는 그 배(하단전)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흘러나오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거나 배고프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선도에서 말하는 소주천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선도적 전통에 의하면 소주천을 완성하여 단을 이루면 그 사람의 이름이
선계의 명부인 선적(仙籍)에 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은 곧 영생을 얻은 사람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고 한
예수의 말과 동일하다.
또한 예수는 사람이 영생하려면 물[氣]과 성령[神]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연정화기와 연기화신의 단계를 거쳐서 양신을 만들어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해야 죽음을 거치지 않는 선도와 같은 맥락이다.
예수는 또 말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이다.”

 

예수는 육체적인 생산이 아니라 영(선도의 神)으로써 영[陽神]을 낳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예수가 사람들에게 안수를 행함으로써 치료를 행하는데 이는 선도의 기공치료인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양신(보혜사 성령)을 화신으로 복사 분열시켜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붙여주었다.

 

이는 대쿤달리니의 고급과정으로서 아바타르에 해당한다.
티베트에서는 이러한 그룹의 대표적인 사람이 파드마삼바바이며 또한 밀라레파이다.
예수는 확실한 쿤달리니 완성자라고 볼 수 있다.
십자가에서 행한 영육분리와 부활은 티베트에서 말하는 포와 즉 의식이동에 속하며
사람들의 눈앞에서 승천하는 것은 우화등선, 육신등천의 단계를 보여준 것이다.

 

붓다가 무우문화의 대표로서 쿤달리니를 완성시키고 더 발전시킨 사람이라면
예수 역시 아틀란티스 문화권의 대표로서 쿤달리니를 더 한층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이차세계대전 이후로 무우와 아틀란티스의 해묵은 경쟁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나찌들은 아리안족의 후예를 표방하면서도 그 문양을 무우의 상징
즉 티벳 뵌교의 상징인 스와스티카를 자신들의 표상으로 삼았다.
여기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 때 히틀러는 티베트의 한 수도승의 자문을 오랫동안 받아왔다는 설이 있었다.

 

어쨌든 현재 지구는 어떤 문화가 더 우월한지를 따질 때가 아니라
고대 문화를 꽃피우고 그것을 십분 활용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사실상 지구는 아직도 모든 면에서 현대문명이 고대문화를 충분히 극복했다고
볼 수 없다.
현대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합해 과거 잃어버린 선조들의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발전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종교란 단순한 정신적 위안만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 마르크스의 말에 동의하지 말고
본래 종교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따져보자.
그것은 인간의 진화, 신성에의 진입을 꾀한 것이며 그것이 오늘날 수행문화로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펌글